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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복지뉴스

칼럼 김영탁 감독·작가

아버지의 곰탕

2019. 2
김영탁 감독·작가

근래에 『곰탕』이라는 첫 소설을 내게 되었다. 영화감독이라는 업이 있었고 그 업에 제법 열심이었기 때문에 소설은 계획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은 그 소설을 원작으로 TV 드라마까지 제작 중이니 한동안은 더 소설 『곰탕』 속에서 살게 될 거 같다. 이 일련의 일들이 가능했던 건, 모두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1933년생이셨다.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마흔 중반이었다. 내게 아버지는 그 나이만큼 멀고 어려운 사람이었다. 이른바 종갓집이었고 위로 누나 둘에 내가 막내아들이었으니, 집안에서만큼은 귀한 아들이었음에도 아버지는 내게 엄했다. 하지만 두 딸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다정했다. 아버지 하면 먼저, 딸들에 대한 유별난 사랑이 기억난다.

고향 집은, 그러니까 아버지 집은, 지어진 집보다 마당이 넓었는데, 그 마당의 대부분이 나무들과 잔디였다. 그 나무들과 잔디를 관리하느라 아버지는 꽤 공을 들이셨다. 문제는 그날이 늦가을이었고, 큰누나의 남자친구가 처음 인사를 하러 온다는 거였다. 아버지는 성급하고, 유별나며, 어떤 면에서는 완벽주의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큰딸의 남자친구에게 몹시 깨끗한 집을 보여주고 싶어 했던 거 같다. 마당 청소는 나와 아버지의 몫이었고, 아버지는 나에게 “낙엽을 좀 줍자”라고 쉽게, 간단히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무가 많으면 낙엽도 많다. 잔디 위에 떨어진 낙엽은 나무의 종만큼이나 다양해서, 줍기 편할 만큼 큼직한 것도 있었지만 눈으로 봐도 보이지 않는 작은 것도 많았다. 어떤 건 뾰족해서 손을 찌르기도 했고, 쓸어도 잘 쓸리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그러니 결국은 아버지의 말처럼 일일이 손으로 주어야 했다. 한 시간을 훌쩍 넘게 줍다가 화를 참지 못하고, 하지만 무서우니 공손하게,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가을에 낙엽이 많이 쌓여있는 게 자연스러운 건데, 이걸 왜 굳이 다 주워야 해요?”

하지만 아버지는 자연스러운 건지 모르겠고 보기 안 좋으니 마저 주우라고만 했다. 결국, 낙엽이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한참을 더 주웠다. 그때 생각했다. ‘이 남자, 딸들에게 미쳐있구만!’ 그래도 그때는 작은누나 때처럼 목숨의 위협을 느끼지는 않았다.

작은누나는 다른 지역 고등학교에 다녔다. 버스로 가면 세 시간, 승용차로 가도 두 시간은 넘는 거리였다. 작은누나가 밤이든 새벽이든 보고 싶다, 힘들다, 말 한마디 하면, 아버지는 차를 타고 달리셨다. 두 시간을 넘게 가야 할 거리를 한 시간 반 만에 간 적도 있는데, 그때는 정말 무서웠다. 휴게소 호두과자도 못 먹을 거 나는 왜 같이 간다고 했을까, 엄마는 옆자리에 앉아 더 무서울 텐데 어떻게 아무 소리도 안 하고 있나, 너무 무서워서 말을 잃으셨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목숨 내놓고 달려서 작은누나를 막상 만나면 아버지는 웃기만 했다. 뭐가 좋은지, 허허. 분명히 나와 함께 목숨의 위협을 느꼈을 텐데 엄마도 아무렇지 않은 듯 실실 웃기만. 몇 년 뒤 나도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을 때, 작은누나에게 말했다. “아빠한테 힘들다, 보고 싶다, 전화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되도록 낮에만, 낮에만 해.”

그렇게 딸들을 사랑하던 사람이, 그렇게 철저하던 사람이 그렇게 준비성 없이, 갑작스럽게 가족의 곁을 떠났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첫 영화 〈헬로우 고스트〉를 개봉하고 1년이 지난 가을이었다. 아들의 첫 영화를 보러 시사회에 오셨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소식을 듣고 서둘러 내려갔을 때는 아버지의 사진 곁에서 엄마가 울고 있었다. 바로 어제 통화하며 “추석에 언제 올 거냐?” 묻던 아버지였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죽은 아버지의 시신을 닦을 때 알았다. 타인이 자신의 몸을 아무렇지 않게 닦고 있는데도 물리치지 않는 아버지를 보고, 돌아가셨구나, 깨어나지 못하는구나, 알았다. 살아계셨다면 그렇게 오래 미동도 없이 누워계시지 못하셨을 것이다. 벌써 일어나셨거나, 여기, 저기, 하시다가 결국 본인이 직접 몸을 닦으셨을 거다. 아버지는 성급한 사람이었으니까.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어머니는 많이 힘들어하셨고, 나는 한동안 고향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서울로 돌아온 후로는 영화 준비로 바빴다. 아버지가 알려준 적 없었지만, 아버지가 없으니 내가 가장이다, 이런 생각을 혼자 했던 것 같다. 더 꼿꼿이 서고 더 단단히 서 있어야 한다, 그런 말들을 혼자 자꾸 했다. 아버지가 부재하고 나서야 내게 거대한 버팀목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던 날들이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어머니가 얼려주신 곰탕을 녹여서 아내와 먹다가 나도 모르게 이런 말들을 뱉었다. “아버지도 곰탕을 참 좋아하셨는데. 시간여행이라도 가능하면, 이 곰탕, 아버지 살아 계실 때로 가져가서 함께 먹었으면 좋겠다”하고. 그렇게 곰탕 이야기가 자리 잡았다. 영화 준비를 하며 틈틈이 그 이야기를 키워나갔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메모하고 메모했다. 그리고 마흔이 되던 해에 긴 글로 옮겼다. 첫 소설이 되었다. 여행지에 머무는 동안 쓴 초고를 출판편집을 위해 몇 년이 지나 다시 읽어보았을 때, 내가 아버지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었는지, 그가 없는 현재를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은 더 있다. 나를 옆에 끼고 앉아 ‘주말의 명화’를 보던 아버지, 어디까지가 지어낸 이야기인지 모를 옛날이야기들을 들려주시던 아버지, 큰 결정마다 말없이 믿어주셨던 아버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그 눈. 아버지의 눈은 자주 먼 곳에 가 있었는데, 나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그런 눈을 보고 있는 게 재밌었다. 이곳에는 벌어질 수 없는 무언가를 떠올리느라 반짝이고 있는 아버지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아버지가 가 있는 곳이 어딘지, 아버지가 상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도 그 상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었다. “아버지, 어디서 뭘 하고 계세요?” 물어본 적 없지만, 아버지의 그런 눈을 보고 있는 게 좋았다. 그 눈은 나를 상상하게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8년이 지났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도 오래되어간다. 오롯이 아버지 덕분인 소설 『곰탕』 이 남겨진 것은, 어쩌면 게을러지는 내 기억을 소설이 대신하길 아버지가 바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책으로 남겨진 기억은 사라질 리 없으니까. 아버지는 제법 철저한 사람이기도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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