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의 사회적 지위
2018. 10
예술인은 어떤 지위를 가지는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술인의 정의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가 있다. 1980년 10월, 유네스코는 제21차 총회에서 ‘예술인의 지위에 관한 권고’에서 예술인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예술인이란 예술 작품을 창작하거나 독창적으로 표현하고 혹은 이를 재창조하는 사람, 자신의 예술적 창작을 자기 생활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생각하는 사람, 이러한 방법으로 예술과 문화발전에 이바지하는 사람, 고용되어 있거나 어떤 협회에 관계하고 있는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예술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거나 인정받기를 요청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유네스코의 정의에서 주목할 것은 예술인의 ‘생활’과 ‘인정’에 대한 설명이다. 독창적인 표현능력으로 창작행위를 하는 사람이라는 예술인의 일반적 정의는 여기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예술인의 창작활동과 자기 생활 사이의 관계는 무엇이며, 예술인은 어떻게 인정받는가 하는 것이다.
* 캐슬린 김, 『예술법』, 학고재, 2013, 37쪽에서 재인용. 이하 인용은 본문에서 쪽수로만 표시.
이 정의는 많은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아는 예술인의 일반적인 정의에 해당된다. 작곡가, 연기자, 연주자들이 이 정의에 따라 당장 떠오르는 사람들이다. 창조적 행위와 미적인 표현행위, 그리고 그것들을 작품으로 만드는 사람들은 예술인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예술인들을 특정한 예술 장르에 국한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술 장르는 사회의 변화에 따라 항상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소설가라는 직업은 중세 때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근대 산업자본주의 시대 대량인쇄 기술이 생겨나면서 등장한 새로운(novel) 형태의 예술가였다. 미디어 아티스트나 로봇 아티스트는 요즘 등장한 신종 예술인이다. 따라서 예술인은 레이먼드 윌리엄즈의 언급을 비유하자면, 소설가, 시인, 극작가 등 지배적인(dominant) 장르에 속한 예술인만이 아니라, 서예가, 시조창가 등 잔여적인(residual) 예술인 그리고 웹툰 작가, 일루젼 아티스트 등 새롭게 부상하는(emergent) 예술인으로 구분할 수 있다. 말하자면 예술인은 고정된 주체가 아닌 것이다.
자신의 예술적 창작을 자기 생활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생각하는 사람두 번째 예술인의 정의는 예술-삶 속에서 창작을 중요한 활동으로 간주하는 사람의 경우이다. 이런 경우는 대체로 프리랜서 예술인들로 정의할 수 있다. 특별한 것은 프리랜서 예술인을 어떤 규정이나 기준에 의해 정의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정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예술인의 정의에서 ‘예술-삶’의 의미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공연, 전시, 출판의 형태로 재현하는 일련의 창작 시간의 과정을 강조한다. 이 정의는 예술노동과 예술복지로의 관점으로 예술인을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예술과 문화발전에 이바지하는 사람세 번째 예술인의 정의는 예술인의 사회적 가치와 역할을 이해하는 데 적절한 정의라 할 수 있다. 예술인은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 창작활동을 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창작물이 관객들을 즐겁게 하고, 한 시대의 문화적 역량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면, 예술인은 사회적 가치를 생산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술인의 미적 활동이 사회적 가치를 갖는 방식은 다양하다. 독자와 관객의 감동, 공공영역에서의 시각적-연행적인 기여, 예술교육의 치유 및 감성 효과 등등 예술인은 작품 그 자체의 가치만이 아니라, 작품의 활동으로 인해 생겨나는 다양한 파생 효과를 통해 자신의 사회적 존재의미를 드러낸다.
고용되어 있거나 어떤 협회에 관계하고 있는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예술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거나 인정받기를 요청하는 모든 사람네 번째 것은 예술인을 정의하는 가장 폭넓은 정의에 해당된다. 이 정의에 해당되는 예술인이 예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이나, 예술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창작 역량이 높은 수준에 있어 예술가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 정도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다. 사실 현재 한국에서 예술인의 정의는 특정한 전문 교육기관에서 예술을 전공하는 사람들이거나, 예술인으로 어느 정도 창작활동의 경력을 인정받는 사람들이다. 예술인으로서 복지의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 예술 활동 증명을 신청해야 한다. 졸업증, 자격증, 작품 활동 경력, 수상실적과 같이 자의적 인정이 아니라 객관적 인증이 가능한 제도 안에 포함되어야지만 예술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술인의 네 번째 정의는 제도화된 예술인이 아니라 자발적, 자율적, 자생적 요청에 의한 호혜적 정의라는 점에서 예술인의 주체적 역량을 가장 강조한 것이다. 한 가지 논쟁적일 수 있는 점은 자발적, 자율적, 자생적 예술인으로 요청하는 과정에서 현재 상당한 발전을 이루고 있는 생활예술인에 대한 사회적 인정을 어떻게 하는가이다.
미국 뉴욕 주의 법에서 정한 예술인의 세 가지 형태의 정의이 밖에 예술인의 정의에 있어서 미국 뉴욕 주의 법에서 정한 예술인의 세 가지 형태의 정의를 참고할만하다. 뉴욕 주는 예술인을 시장적 정의, 교육과 협회에 따른 정의, 자신과 동료에 의한 정의로 구분해서 설명한다. 예술가로서 창작활동을 통해 생계를 꾸려나가는 사람이 시장적 정의라고 한다면, 예술가 협회나 조합에 가입하거나, 교육기관에서 예술 관련 전공을 이수한 사람은 교육과 협회에 따른 정의에 해당된다. 반면 자신을 스스로 예술인으로 여기고 창작활동에 많은 시간을 투여하며 함께 활동을 하는 동료에 의해 예술인으로 인정받는 경우는 자신과 동료에 의한 정의에 해당된다(38쪽). 이러한 세 가지 정의를 고려하면 예술인은 단지 공식적인 창작활동만으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예술인은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다양한 창작활동뿐 아니라, 창작활동에 대한 자기 확신을 통해서도 인정받을 수 있다. 예술인을 전통적인 장르로 구분하여 정의하거나 특정한 자격으로 정의하지 않고, 예술에 대한 활동이나 태도로 정의하려는 시도 역시 예술가를 정의하는 데에 일상과 활동에 대한 고려가 중요하다는 점을 알려준다.
‘위상’으로서 예술인은 어떤 존재인가이상과 같은 예술인에 대한 정의가 곧바로 예술인의 지위와 동일시될 수는 없다. 예술인의 지위(status)는 예술인으로 공인받는 제도적, 객관적 신분으로서의 절차만으로 좁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예술인의 지위는 직접, 신분, 존재감으로서 획득될 수 있는 것만 아니라, 그것이 어떤 ‘위상(topos)’을 갖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위상’으로서 예술인은 어떤 존재인가? 그것은 예술인이 스스로 결정하면서도 예술인이 처한 사회적 관계의 위치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예술인의 사회적 관계와 위치라는 주체적 주장과 객관적 호명이 예술인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한다.
예술인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이지만, 예술인의 지위는 사회적이다. 예술인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존재이지만, 그 지위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예술인은 사회문화의 변동 속에서 생성되고, 사회적 요청에 의해서 그 가치가 매겨진다. 예술인의 지위는 개인의 미적인 활동을 통해서 사회적 위상을 획득하고, 사회구성원이 예술인의 창작물을 향유함으로써, 그 지위의 상징적 가치를 각인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관계 속에 존재한다. 예술인의 지위는 제도적 자격과, 칭호라는 객관적 근거를 통해서 얻어진다. 그러나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예술인은 또한 사회 구성원에게 미적인 즐거움을 선사하고, 창작활동을 통해 사회적 의미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예술인의 창작활동은 사회변화에 영향을 주고, 시대의 현실을 표상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다. 예술인이 스스로 자신을 사회화하면서, 사회적 구성원이 예술인들을 사회적 주체로 호명하면서, 예술인의 지위는 비로소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예술인의 지위는 예술인 스스로가, 사회 구성원 스스로가 상호 호명할 때, 가능하다.
이 글은 2018년 9월 11일 〈예술인의 지위 및 권리 보장에 관한 법률(가칭, 이하 예술인 권리보장법) 제정을 위한 토론회〉 발제문 “예술인의 지위와 권리란 무엇인가” 중 ‘예술인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내용을 발췌한 것으로, 전문은 한국예술인복지재단 홈페이지 자료실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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