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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6 2017. 7 로고

예술인복지뉴스

칼럼 성악가 허성은

예술보다 무거운 이방인의 굴레

2017. 7
예술보다 무거운 이방인의 굴레

“23마르크가 아니라 32마르크라고요!”
짜증 섞인 계산대 직원의 말에 당황한 듯 허둥지둥 지갑을 뒤지고 있는 한국인 A교수에게 직원의 혼잣말이 뒤이어 화살처럼 꽂혔다.
“하여간 외국인들이란, 쯧쯧…”
미안하단 말을 연발하며 10마르크짜리 지폐를 더 내밀고 거스름돈을 받은 뒤에야 A교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클래식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한국인이라면 이름 한 번쯤 들어 봤을 법한 세계적인 연주자 A교수는 한국뿐 아니라 유럽 클래식계에서도 존경받는 대표적인 한국인 음악가였다. 그런 그가 한 자릿수를 먼저 말하는 독일어 숫자 읽기가 익숙하지 않아 액수를 잘못 내민 것이다. 마침 계산대 줄에 서 있다가 이 광경을 목격한 독일인 동료 교수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계산대 직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장 사과하시오! 그리고 영광인 줄 아시오! 당신이 이런 세계적이고 위대한 음악가를 마주하게 될 확률은 1%도 되지 않을 테니!”
한국 유학생들 사이에서 이 일화는 마치 영웅담처럼 자주 회자되곤 했다. 나 또한 독일에 온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이 이야기를 접했다. 그 순간에는 인지할 수 없었던, 이야기 뒤에 감춰진 씁쓸하고 아픈 이방인이라는 무게를 내가 직접 피부로 느끼기까지는 불과 6개월도 걸리지 않았다.

아직 짧은 독일어 대신 영어로 일상생활을 하던 시절 내게 친절했던 독일 사람들이 태도를 180도 바꾼 건 내가 더듬더듬 독일어를 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잘 알아듣지 못해 한 번만 더 말해 달라고 부탁하면 밀려오는 짜증을 전혀 감추려 들지 않고 같은 문장을 속사포처럼 쏘아대기 일쑤였고, 은행이나 관공서에서 독일어 문법이 조금이라도 틀린 말을 하면 단순한 문장임에도 아예 못 알아듣는 척을 하면서 독일어 잘하는 사람을 데리고 다시 방문하라고 하는 일도 흔했다. 한국에서는 숨 쉬듯 쉽게 이루어지는 일상의 모든 일들이 내게는 매번 도전이었고 스트레스였다. 6개월의 짧은 어학연수를 마치고 학교에 입학하여 생애 처음으로 혼자 살 작은 아파트를 얻으면서 이러한 차별은 단순히 언어의 불편함을 넘어서 나의 모든 일상은 물론, 클래식 음악가라는 나의 꿈조차 송두리째 흔들 수 있는 엄청난 무게로 나를 짓눌러 왔다.

첫 아파트의 83세 주인은 계약서를 쓰길 차일피일 미루더니 내가 이사하자마자 구두 계약과는 달리 집세를 20% 인상했다. 독일 부동산법상 3년 이내에 집세를 10% 이상 올리지 못하게 되어 있지만, 계약서가 없었던 나는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 계속 이 집에 있다가는 언제 또 집세를 더 올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4개월 만에 급히 이사를 나오게 되었고, 계약서가 없는 집에 다음 세입자를 구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기에 나는 고스란히 보증금을 떼이게 되었다. 꼼꼼히 계약서를 쓰고 들어간 두 번째 집에선 이사 첫날부터 아래층에 사는 노부부가 올라와 “네가 외국인이라서 모르는가 본데 법적으로 저녁 7시 이후에는 소음을 내면 안 된다”면서 삿대질을 해댔고, 난 무서움에 떨며 짐도 풀지 못한 채 찬 바닥 위에 매트리스를 깔고 잠을 청해야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고 심지어 이사한 날은 밤 10시까지 벽에 못을 박는 소음을 내도 괜찮도록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었다. 그날 이후 그들은 내 발소리만으로도 찾아와 항의하기 일쑤였다. 외국인이니 법적 대응은커녕 제대로 대거리조차 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그들의 행동에는 망설임이나 죄책감 따위는 없었다. 보다 못한 집주인이 접근금지 신청을 법원에 한 이후부터 조금 나아졌지만, 아래층에서 천장을 두드린다든지 우연히 만날 때마다 나를 수 초간 노려보는 일은 2년 내내 계속되었다.

2003년 결혼 후 넉넉지 않은 유학생 부부였던 남편과 나는 학교 근처 고급빌라 반지하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이사한 지 두 달이 지나지 않아 집주인은 돌연 전화로,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당장 집을 비워달라는 통보를 했다. 졸업시험을 3개월 남짓 앞둔 내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근심 가득한 내 모습을 본 지도교수가 집주인에게 전화해 자초지종을 물었고, 내용인즉 총 7가구가 사는 그 빌라의 3채는 주인 것이고, 나머지 4채에는 자가 소유주들이 있는데 1년에 한 번 모이는 집주인 회의에서 2층에 사는 노부부가 우리를 쫓아내자고 강력히 발의했다는 것이다. 거기에 다른 이웃들도 동의하면서 집주인이 울며 겨자 먹기로 계약해지 통보를 했다고 했다. 지도교수가이 집주인으로부터 받은 그들의 안건 발의 공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아시아인을 사랑한다. 하지만 오직 아시아에 사는 아시아인만을 사랑한다.”
지도교수는 격노했고, 이는 명백한 외국인에 대한 멸시와 차별이라는 내용의 항의 편지를 법원에 제출했다. 하지만 그들은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반지하 창문이 법정 창문규격보다 작다고 정부 기관에 신고해 결국 우리를 쫓아냈다. 다른 독일 학생들이 20년 이상 그곳에 살 때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몸이 상한 나는 노래를 할 수 없었고 결국 졸업연주를 한 학기 미루고 이사를 해야만 했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졸업을 하고 오스트리아로 이사하면서 깊은 상처를 남긴 5년간의 독일 유학 생활은 끝을 맺게 되었다.

유럽에 사는 한국인들 대부분이 이런 외국인 차별에 대한 경험과 거기서 오는 크고 작은 상처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하지만 거기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모든 상황 속에서 지나친 피해의식과 방어기제에 사로잡혀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없게 되고 나아가 정상적인 삶조차 어려워진다. 집 밖을 나가기가 무섭고 초인종 소리에 깜짝 놀라거나 우편함에 든 흰 편지 봉투만 봐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병적 증상이 나에게도 몇 년간 이어졌다. 12년이란 시간이 지난 지금, 독일과 독일인에 대한 나의 상처는 많이 아물었고, 내게 일어났던 사건들이 일반적이지 않은 다분히 특별한 경험이란 걸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그리고 그런 어려운 순간마다 나를 진심으로 위로하고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었던 사람들이 모두 독일인이었음도 인식하게 되었다.

나의 영원한 스승이자 멘토인 독일인 교수는 항상 내 편에서 걱정과 위로와 법적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오페라극장 합창단의 독일인 변호사 동료는 무료로 모든 공문을 써 주고 법적 절차와 변호를 도와주었다. 외국인으로 차별받는 나의 상황에 공분하며 진심으로 나를 동료로, 친구로 여기고 돕던 그들이 나의 좋은 친구임을 그때 나는 깨닫지 못했다. 내 마음속의 그들은 친구가 아니라 그저 친절한 독일인이었던 것이다. 나의 독일 이웃들에게 내가 그들의 세계에 들어올 수 없는, 혹은 들여놓기 싫은 이방인이었듯이 나에게도 독일인은 친절 혹은 불친절의 차이만 있을 뿐 결국 모두 이방인이었다. 국적이나 인종과 상관없이 타인을 한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을 열 때 진정한 관계라는 것이 형성되는데, 이런 면에서 어쩌면 그들보다 내가 지극히 좁고 더 폐쇄적이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이제야 나도 조금씩 독일인, 스위스인이 아닌 나와 같은 한 개인으로 마음을 열고 이들과 친구가 되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내가 나고 자란 한국과 비교할 순 없겠지만 이제 여기에도 내가 속한 나의 사회가 생겼고, 그 사회 속에는 친구, 이웃, 동료가 있다.

나를 또, 타인을 이방인의 틀에 가둬두기보다 언어의 한계 때문에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더라도 먼저 마음을 열고 인격적 관계를 원하는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진심으로 소통하는 일은 예술 이상으로 가치 있고 소중한 일일 것이다. 타인과 교감 혹은 공감할 수 없는 표현이 예술로 향유되기 어렵듯이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곳, 이곳의 사람들과 교감하고 공감하지 않는 삶을 진정한 삶이라고 명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허성은(성악가)
  • 허성은(성악가) 2004 독일 Essen Folkwang Hochschule Musik Theater Diplom
    2008 오스트리아 Kunst Uni. Graz Master Konzertgesang, Master Gesang
    현재 스위스 베른 거주
    Vokal Ensemble BeCant 단원
    콘서트 솔리스트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