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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69

202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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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제2의 한강’을 탄생시키려면
글_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출판평론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들리자마자 출판시장은 역사상 최초의 돌풍에 휩싸였다.1주일도 지나지 않아 한강 작가의 책들이 100만 부 판매를 돌파했으며 1,000만 부 돌파도 가능할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됐다. 침체된 문학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해외 독자들에게 한국문학에 대한 관심을 크게 촉발시켰다.

이런 일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한강의 작품들 중 지금까지 영어권에 번역 출간된 작품은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흰』, 『희랍어 시간』, 『작별하지 않는다』 등 다섯 권이다. 한강의 작품은 영어판뿐만 아니라 수십여 언어권에서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채식주의자』 영어판이 출간된 2015년 1월을 기점으로 본다면 약 10년 동안 외국 독자들이 한강의 작품을 꾸준히 읽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 한강 문학의 ‘뾰족함’ 때문일 것이다. 나는 〈조선일보〉 2000년 9월 14일자에 발표한 「한국문학과 노벨상」이란 글에서 “문학 자체가 가져다주는 감동의 구조와 상상력을 회복하는 일에 옥쇄할 수 있다는 문인들의 각오만이 우리 문학에 세계성과 노벨문학상 수상의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또 2023년에 발표한 다른 글에서는 “작가의 삶의 지문을 보여주는 ‘뾰족함’이 없으면 시장에서 바로 퇴출된다. 이제 책(소설)은 임팩트가 강하면서, 예외적이고, 완전히 새롭고, 재미가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한강 문학의 뾰족함에 대해서는 수상 이후 많은 이들이 분석한 바 있다.

한강은 2016년에 『채식주의자』로 아시아 작가 최초로 영국의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했다. 이 상의 수상이 결정되기 직전에 사실상의 노벨문학상 수상작으로 볼 수 있는 『소년이 온다』의 영어판이 출간되었다. 관계자들은 『소년이 온다』의 영어판 출간이 『채식주의자』가 부커상을 수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후 한강의 작품이 세계 독자들에게 읽혔기에 이번에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채식주의자』 영어판 출간에 대산문화재단의 번역 지원이 밑받침되지 않았다면 ‘한강의 기적’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한강 작가는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시작으로 말라파르테 문학상, 산클레멘테 문학상, 메디치 외국문학상, 에밀 기메 아시아문학상 등 해외 문학상을 연이어 받았다. 2019년 가을에는 노벨문학상의 나라 스웨덴에서 개최된 예테보리 국제도서전에 초대되어 현지 독자와 소통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한강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수 있는 조건을 빠르게 갖췄다고 볼 수 있다.


‘제2의 한강’을 배출하려면 우리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먼저 우수한 문학작품을 자유롭게 펴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만 한다. 문학은 우리 몸의 비타민과 같은 존재다. 소량이나마 갖추고 있지 않으면 목숨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문학이 흥해야 출판시장이 활성화되고, 문학적 상상력이 넘쳐나야 문화융성이 가능하다. 문화적 위상이 높아지면 우리 상품의 수출이 늘어나 경제성장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다. 하지만 작금의 환경을 보면 문학 자체는 위기가 아니었지만 문학 생산과 소비 시스템은 엄청난 위기였다. 공공도서관에서 독서와 관련된 예산이 대폭 삭감되는 바람에 세계에서 가장 낮은 성인 독서율이 더욱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각급 학교에서 책을 읽히는 수업이 줄어들고 있었다.

문학 생산자들도 위기였다. 소설 초판을 3,000부도 발행하지 못한 지는 오래되었고, 지금은 1,500부 이하로 낮추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이런 현실에서는 작가가 소설 쓰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작가의 창작지원금은 축소되었고, 우수문학도서 선정 예산도 대폭 감액되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출판 관련 예산도 넉넉지 않아 작가들이 마음 놓고 소설을 쓸 수 있는 환경 조성은 불가능했다.

독자가 공공도서관이나 학교에서 문학을 소비하는 데에는 이미 여러 제약이 존재했다. 작가들의 창작 의욕을 고취시키려면 발표지면부터 확대되어야 한다. 잡지업계의 불황은 문학잡지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주요 문학출판사들이 출혈을 감수하며 펴내는 소수의 문학잡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문학잡지는 생존을 걱정할 정도다. 수많은 잡지가 원고료마저 지급하지 못하는 수준이다.

문학잡지는 공론의 장이다. 공론의 장에서는 문학작품의 질을 높이는 다양한 토론이 벌어진다. 이런 잡지를 1,700여 개의 공공도서관과 대학도서관에서 각 2부씩만 구입해주어도 문학시장은 획기적으로 달라질 것이다. 나아가 6,500여 작은도서관에서 몇 종의 문학잡지라도 구매해 배치할 수 있는 예산을 지원한다면 엄청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우수한 한국의 문학작품과 예술이 세상에 알려지는 데는 질 좋은 번역이 있어야만 한다. 한국문학번역원과 대산문화재단 등은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위해 꾸준히 활동해왔다. 한국문학번역원은 2001년부터 지금까지 44개 언어권에서 2,000건의 번역 및 출판 활동을 지원해왔다. 대산문화재단도 지금까지 400건의 번역 지원 활동을 벌였다. 한강 작가의 작품들도 대부분 이들 기관의 지원을 거쳐 전 세계에서 출판되었다. 이제 이런 예산을 크게 증액해 우리 문학의 해외 진출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만 한다.

한국문학의 세계화에는 전문 에이전트와 번역가의 노력도 적지 않았다. 이제 에이전트들이 저작권의 ‘수입’보다 ‘수출’로 생업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지금 한국문학의 세계화는 몇 명의 헌신적인 에이전트의 노력에 힘입은 바가 크다. 자동번역이 가능한 세상이 되었지만 전문 번역가의 육성 또한 반드시 이뤄져야만 한다. 예술인복지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기본 절차로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서 운영하는 예술활동증명의 경우 문학 장르로 작가뿐 아니라 번역가도 신청할 수 있다. 작가 및 번역가의 직업적 권리를 지키고, 공정한 예술생태계가 확립될 수 있도록 예술인복지정책도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가르치는 외국의 대학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런 대학에서 우수한 학생들을 많이 배출할수록 한국문학의 미래는 더욱 밝아질 수 있다.

‘한강의 기적’은 작가의 노력과 몇 사람의 헌신에 힘입은 바가 크다. 앞으로 이런 기적이 꾸준히 일어나게 하려면 앞에서 예시한 여러 정책이 어우러지는 항구적인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한다.



* 이 칼럼은 필자의 견해이며, 〈예술인〉 뉴스레터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