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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철학자, 시몬느 드 보봐르가 ‘여성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했던가. 성의 불균형과 불평등 사회를 저격한 표현이 아직까지도 수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이 사회가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방증이리라. 하지만 표현이 외침과 행동으로 이어진다면 이 땅의 많은 여성 예술인들이 여성이자 엄마로, 그리고 창작하는 예술인으로 빨리 제 자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여기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좋은 본보기로 자리한 여성 예술인을 소개한다. 여성으로 태어나 엄마이자 예술인으로 만들어진 김지수 미술감독이다.
건축, 인테리어, 패션, 분장 등 하고 싶은 것이 많아,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90년대 중반에 영화의 비주얼을 담당하는 미술감독 분야가 생겼어요. ‘올가미’라는 영화로 처음 경험한 영화미술은 제가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는 바로 그 일이었죠. 그때 이후로 흔들림 없이 지속할 수 있었던 건 극장에서 완성된 작품을 관객들과 스크린으로 볼 때의 성취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던 그 순간이 가슴과 머리에 박혀 커다란 에너지가 되었고 20여 년이 그렇게 뚝딱 지나간 거 같아요. 그리고 진심으로 열심히 한 작품들은 제게 진심으로 작품을 디자인해야 한다는 철학을 갖게 했죠. 진심으로 그 스토리에 빠져 디자인한 작품은 예산과 상관없이 관객들이 공감한다는 경험도 했고요. 이 경험은 제게 다작을 하지 못하게 했지만 제가 선택한 작품에 진심은 다 담았다고 생각합니다.
서른일곱에 결혼해서 서른여덟에 첫째 딸을, 그다음 해에 둘째 아들을 낳았어요. 일만 하다가 결혼과 출산이 늦어졌죠. 미술감독으로 안정된 후 결혼을 해서인지 출산과 육아 후에 다시 작품을 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어요. 결혼과 일을 병행하는 것이 두려워 버틸 만큼 버티고 결혼한 것 같아요. 이젠 결혼해도 잘할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기고 ‘지금 아이를 낳지 않으면 못 낳을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에 결혼을 결심했죠.
첫아이를 갖고 둘째까지 연년생으로 낳고 4년 동안 영화를 쉬었어요. 이유 중 하나는 영화현장은 뾰족하고 험해서 임산부나 아이를 둔 엄마는 미술감독으로, 스텝으로 쓸 리 없기 때문이었죠. 그냥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심지어 작은 체구를 가진 저는 세고 강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당하는 작품도 있었어요. 하지만 진심으로 일을 한 결과, 아이를 낳고도 다시 일할 수 있는 자리까지 오긴 했는데, 엄마가 되고 보니 시나리오를 받으면 어린아이와 시나리오를 번갈아 보게 되더라고요. ‘이 시나리오 때문에 이 아이를 놓고 나가는 게 맞는 건가’하는 고민. 그렇게 4년은 강의만 하고 영화 작업은 안 했어요. 아이가 네 살이 되어 다시 작품을 시작했는데 아이 아빠가 스케줄을 맞춰 육아를 같이 했는데도 쉽지 않았습니다. 유아식을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놓고 밤샘 촬영을 해야 했고, 촬영 후 돌아와서 불덩이가 된 아이를 안고 울기도 했고, 배우 의상 피팅하는 날 아이를 등에 업고 감독의 눈치를 보기도 했지요. 하지만 매 순간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큰아이가 아토피, 작은아이가 ‘가와사키’라는 병으로 아팠어요. 서울에서 경기도 양평 산속으로 이사를 갔죠. 그러던 중 제주도에서 6개월을 지내야 하는 작품이 들어왔어요. 아이 둘을 데리고 남편이랑 6개월 동안 제주 가서 살아보자고 내려간 것이 벌써 5년이 되었네요. 아토피가 나아지고 면역력이 떨어지던 작은아이도 지금은 완전히 건강해졌어요. 제주로 내려간 후 작품을 할 때는 주말 부부로 지냅니다. 일 년에 한 작품만 했어요. 반은 작품에 매진하고 반은 다시 엄마로 돌아오고, 남편이랑 육아도 바통 터치하며 하고 있어요. 어쩔 수 없을 때만 가족 찬스 좀 씁니다(웃음).
많은 엄마 미술감독들은 작품과 아이 중, 아이를 선택합니다. 특히 아이가 어리면 서로 부담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죠. 아이를 믿고 맡길 곳이 없는 엄마들은 어쩔 수 없이 단절될 수밖에 없겠지만, 재능 있는 여성들이 육아로 모든 걸 내려놓고 나중에 다시 일어서지 못 하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냥 다시 일어나면 되는데’하고 생각하겠지만 그게 만만한 일이 아닌 거죠. 현장에서 활동하는 많은 여성 예술인들 상당수가 적령기를 넘겨 솔로인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만큼 아이가 있는 엄마 영화인들은 서로 눈만 봐도 손을 잡아 줄 만큼, 서로들 아는 어려움이 있어요.
아이를 낳고 기르는 과정에서 생긴 용감함과 자신감, 아이를 생각하면 못할 게 없다는 자신감과 용기가 생겼어요. 그리고 저를 쳐다보는 아이들의 눈이 제게 세상을 너그럽게 보게 하는 힘을 준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작품과 사람을 대할 때 많이 여유로워졌습니다(웃음).
영화나 드라마의 제작 환경이 예전에는 상상도 못할 부분까지 변화되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그러나 종종 미혼이거나 혼자 사는 사람들의 사이클에 맞게 돌아가는 걸 느끼곤 하죠. 현장에서 일하는 엄마들, 아빠들에게 아이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의 보장과 배려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조금만 너그럽게 생각하면 조급할 것이 없는데, 다들 너무 조급하게 일하는 거 같아요. 이런 부분들이 앞으로 좀 달라졌으면 합니다.
저와 같은 엄마 예술인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과 나는 여성이기 때문에 더 잘할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당신과 나는 엄마이기 때문에 더 잘할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라고요. 동료들과 이런 얘기를 합니다.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길러 보지 않고 작품만 했더라면 참 별로인 사람이었을 거 같다고. 엄마 예술인이기 때문에 진심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앞으로 더 공부하고 배워야 할 것들도 보이기 시작했어요. 진심을 갖고, 그 진정한 가치를 아는 여성 예술인이 되고 싶습니다.